절차탁마
논어에는 유명한 고사성어인 절차탁마에 대한 유래가 실려있는데 그 이야기에서 공자는 제자인 자공에게 부와 가난을 대하는 군자의 처신을 말해 주었다.
제자 자공이 가난해도 남에게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남에게 교만하지 않다면 어떻습니까 라고 묻자 공자는 그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긴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살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자공이 시경에서 말하기를 칼로 자르는 듯, 줄로 가는 듯, 정으로 쪼는 듯, 숫돌로 광을 내는 듯하다 라고 했는데 이를 말하는 것이냐고 묻자 공자는 크게 칭찬하면서 자공에게 비로소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을만큼 지나간 것을 알려주니 알려주지 않은 것까지 아는구나 라고 대답하였다.
짧은 이야기지만 공자의 가르침의 핵심이 담겨 있는 이야기로 수양과 학문의 길은 절차탁마, 즉 혼신의 힘을 다하여 끊어짐이 없이 계속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공은 가난한 환경에서 자긍심을, 부유한 환경에서는 겸손한을 가지고 있다면 군자가 아니냐고 질문했으나 공자는 더 높은 단계를 이야기하면서 단순히 자신을 절제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에 순응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특히 부자라면 예를 좋아하여 따라야 한다고 했는데 예는 인을 실천하는 중요한 덕목이고, 나를 낮추고 상대를 배려하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논어에 실려 있는 '도에 뜻을 두면서도 누추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선비와는 함께 도를 논할 수 없다'는 글은 수양의 목표가 되는 도와 일신의 편안함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말로만 항상 수양을 떠들 뿐이고 정작 그 사람의 실제 삶의 모습은 안이하다면 이는 도를 추구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며, 그런 사람과는 함께 교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배우는 자세
한서를 보면 배워서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을 선비라고 했지만 사농공상 가운데에 배움에 뜻을 둔 자가 있다면 이 역시 선비라고 할 수 있다. 옷은 몸을 가림을, 음식은 배를 채움을 취하니 귀천과 상하가 각각 그 제도에 있다.
선비로서 벼슬을 하는 자는 공, 경, 대부의 뒤에 있어서 그 녹봉에 한계가 있는데 하물며 벼슬하지 않는 자라면 어찌 수입이 풍족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나쁜 옷과 음식을 부끄러워하고 화려하고 달달한 것과 살찐 것을 구하고자 시류를 따르고 욕심을 채우려고만 한다면 이는 하늘의 이치를 외면하고 염치를 잃게 되는 행동이니 결국에 의가 아닌 것을 취해 채우는 데 이르지 않을 자가 드물다.
그러므로 선유가 이르기를 나쁜 옷과 나쁜 의복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배우는 자의 큰 병통이니 선한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는 것이 여기에서 근원하므로 선비에 뜻을 둔 자라면 부디 이를 경계할지어다.
배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벼슬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간에 그 생활이 풍족할 수가 없다. 생활이 궁핌해서 먹고 입는 것이 항상 모자라게 되는데 그렇다고 풍족함을 더 추구한다면 의로움을 버리게 되니 탐욕의 길로 빠지게 된다. 당연히 배움의 길에서는 멀어지게 되고 배우는 자의 올바른 자세 또한 유지할 수 없으니 풍요롭고자 하는 마음은 도의 마음과는 상통할 수 없는 것이다.
다산도 풍족함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을 매우 경계하고 통렬하게 지적했으니 오직 풍족한 삶을 추구하다가 삶을 헛되이 하는 자는 금수와 다름없다고 말하였다.
맹자가 말하기를 마음을 기르는 자는 대인이 되고 몸의 편안함을 구하는 자는 소인이 된다고했다. 저들이 소인됨을 달게 여기는데 나 또한 어찌할 것인가? 다산이 말한 이 내용은 맹자에 실려 있는 내용으로 오늘날은 맹자가 살던 시절이나 다산이 살던 시절과는 달라서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하면서 굳이 편안한 삶을 포기할 필요는 없지만 다만 다산이 말한 것처럼 편안함과 안일함을 추구하는 데에 급급하여 헛되이 흘려보내는 삶은 안타깝다.
거창한 결과물이나 대단한 업적을 남겨야만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는 없다. 부당한 이익을 좇지 않고 내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려고 하는 모든 노력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군자의 근심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근심들 가운데에서 상당수는 다음날 아침이 되면 사라질 것들이다. 이를테면 작은 오해로 인한 갈등이나 이미 남들은 잊어버린 나의 작은 실수들, 발생하지도 않을 내일의 일과 같은 걱정들이다. 이런 근심에 마음을 쓰면 집중력이 흩어져서 큰일을 이룰 수가 없다. 여기서 큰일이란 사람을 사랑하고 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이다.
큰일을 행했던 사람으로 요순임금을 꼽기도 하고 요순임금과 같이 위대한 인물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를 본받아 노력하는 것이 바로 군자의 근심이다.
주자는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맹자는 본성의 선함을 말씀하시되 반드시 요순을 예로 들어 말했는데 사람에게 인의는 밖에서 구할 필요가 없고, 요순과 같은 성인일지라도 배워서 이를 이룰 수 있음을 알기에 게으르지 않게 힘쓰도록 한 것이라고 했다.
한 걸음씩 정진하기
우리는 흔히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남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특출한 재능을 보이고 일반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을 했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 또한 배움을 통해 해낼 수 있었을 것이고 평범한 사람이더라도 노력을 통해 큰일을 해낼 수 있다. 인의란 하늘로부터 받은 사람의 본성이어서 날 때부터 사람의 몸에 갖춰져 있는 것으로 굳이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일을 했던 사람들이 소중한 존재였듯이 나 역시 소중한 존재다. 당연히 그들이 했던 일은 나도 할 수 있고 필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내가 스스로 분명하게 정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 후에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는다면 벌써 정해 놓은 목표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선 것이다. 위인들인 남긴 그들의 발자국을 그대로 되짚어보며 나아간다면 나 또한 그들처럼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