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과 외면
논어에는 질승문즉야 문승질즉사 문질빈빈 연후군자라는 유명한 성어가 실려 있는데 이는 바탕이 겉모습을 넘어서면 촌스럽고, 겉모습이 바탕을 넘어서면 형식적이게 되니 겉모습과 바탕이 잘 어울린 후에야 비로소 군자답다는 뜻이다.
이 말은 내면의 충실함과 외면의 단정함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는 말로 공자는 학문과 수양에 대해서 한 말이지만 넓게 보면 인생의 모든 측면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이치이다. 겉만 그럴 듯한 것 뿐만 아니라 내용만 꽉 찬 것 또한 한계가 분명하니 겉과 속이 모두 충실해야 하고, 나아가서 속이 충실하다면 그것을 겉으로도 잘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기에는 용모를 단정히 하고 공손하게 들으며 표절해서 말해서는 안 되며 부화뇌동해서도 안 되니 반드시 옛 것을 근거로 삼아 선왕의 가르침을 말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배움의 자리로 나아갈 때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 말하는 글이다. 첫머리에 나오는 용모를 단정히 하고 반드시 공손하게 들어야 한다는 것은 배움에 충실한 사람이 겉으로 드러내는 자세이고, 다산 또한 아래와 같이 두 아들에게 이러한 이치를 강조하기도 했던 내용이다.
지난번에 너를 보았을 때 옷깃을 여미고 무릎 꿇고 앉으려 하지 않아서 단정하고 엄숙한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는 나의 병통이 한 번 옮겨가서 너의 못된 버릇이 된 것이니 성인이 먼저 외모로부터 수습해 나가야 바야흐로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던 이치를 모르는 행동이다. 세상에 비스듬히 눕고 삐딱하게 서서 큰소리로 지껄이고 어지러이 보면서 공경하게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자란 없다. 그러므로 몸을 움직이는 것, 말을 하는 것, 얼굴빛을 바르게 하는 것이 학문을 하는 데에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니, 이 세 가지에 힘쓰지 못한다면 아무리 하늘을 꿰뚫는 재주와 남보다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끝내 발을 땅에 붙이고 바로 설 수 없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남의 주장을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은 학식을 자랑하기 위해 남의 것을 제 것인 양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학문에 편법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이치는 공부를 넘어서서 인생의 모든 측면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출세를 위해서나 성공을 위해서 편안한 길만 찾으려 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망치는 길이 될 것이다. 편법이 불법이 되고 결국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도덕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
정도를 걷는 자세
다산은 다소 느리더라도 정도를 걸어야 한다고 권하는데 그는 여러 유생에게 베푼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을이 깊으면 열매가 떨어지고, 물이 흘러가면 도랑이 만들어진다. 이는 이치가 그런 것이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지름길을 찾아서 가야지, 울퉁불퉁한 돌길이나 덤불이 우거진 곳으로 가서는 안 된다.
그의 말에서 지름길이란 흔히 알고 있는 빠르고 편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아니고, 빠른 결과를 위해서 요령을 부리거나 편법을 쓰라는 말이 아니라 학문의 기본을 탄탄히 하고 정도를 걷는 길을 뜻하는 것이다. 기본을 탄탄하게 할 때 자연스럽게 학문의 결과를 얻을 수 있고 정도를 걸을 때 오히려 더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니 위에서 말한 표절은 지름길이 아니라 망하는 길인 것이다.
초서의 효과
다산은 책을 접할 때에 단순하게 많이만 읽는 다독이 아니라 초서를 강조했는데 초서란 책에서 중요한 부분을 뽑아서 직접 기록하며 책을 읽는 것으로 이렇게 읽는 것은 당연히 느릴 수 밖에 없다. 그는 아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초서를 이렇게 설명하면서 권했다.
학문의 요령에 대해 전에 말했거늘 네가 필시 그를 잊은 게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초서의 효과를 의심해서 이 같은 질문을 한다는 말이냐? 한 권의 책을 얻더라도 내 학문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은 뽑아 기록해 모으고, 그렇지 않은 것은 눈길도 주지 말하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비록 백 권의 책이라도 열흘 공부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기초를 다지면서 정도를 차근차근하게 밟아가는 것은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다른 사람들의 그럴 듯한 의견에 그대로 따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자기 생각은 없이 남을 따라서 배우고 말하는 것은 학문의 발전이 없다.
후한 말기의 유학자였던 정현은 우레가 울리면 만물이 응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사람의 말은 마땅히 자기에게서 나와야지 우레에 응하듯이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자연에서 우레는 엄청난 소리와 위력을 가지는 것이니 세상의 만물은 우레가 울리면 저절로 귀를 막고 몸을 움츠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의 말과 행동은 무작정 큰 소리나 주위를 위협하는 위력적인 말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고 분명히 스스로 뜻을 세우고 생각에 따라 말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진정한 조화
논어에 실려 있는 군자는 조화를 이루되 같음을 추구하지 않고, 소인은 휩쓸려 어울리되 조화를 이루지는 못한다는 글도 이와 같은 뜻이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눈치껏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자세는 진정한 조화가 아니니 조화란 무작정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 분명한 주관과 독창성을 지닌 채 같은 곳을 바라보며 힘을 합치는 것이다. 목적과 목표를 향해서 한 방향으로 나아가되 그 방법이 획일적이어서도 안 되며, 하나의 방법만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위의 예기의 글에서 반드시 선왕의 가르침을 말해야 한다는 구절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적당하게 재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하는데 온고이지신의 지혜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기존의 것을 바꾸고, 뒤틀고, 다르게 생각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늘 아래에 완전하게 새로운 것이 없듯이 모든 창의적인 생각들 또한 기존의 것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고, 이 때 고전의 지혜는 큰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사람에 관한 지혜이자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전과 옛 인물들의 사상을 들여다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배움에서는 몸을 바르게 정돈한 다음 주변에 휘둘리지 않도록 허리에 힘을 주며 빠른 결과를 위해 조급해하지 않고 차근차근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조금은 모자란 듯 꾸준하게 나의 내면에 내공을 쌓아갈 수 있다면 겉으로 힘주어 드러내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품격이 배어나오는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정한 우정 (0) | 2025.06.09 |
---|---|
변치 않는 우정 (0) | 2025.06.08 |
충고하는 자세 (0) | 2025.06.08 |
친구의 의미 (0) | 2025.06.08 |
친구를 사귀는 기준 (0) | 2025.06.06 |
인생의 시험 (0) | 2025.06.05 |
진실을 바탕으로 한 설득 (0) | 2025.06.05 |
군신 관계 (0) | 2025.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