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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스스로를 닦는 노력

by new-info-spring 2025. 5. 29.

관자의 저서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재상인 관자는 나라를 잘 다스려서 제나라 환공을 춘추오패의 하나로 만들었는데 관자의 이름을 빌려 쓴 책인 관자에서는 경제, 군사, 사회, 교육 등의 모든 분야에 걸쳐 폭넓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특히 관자는 나라를 운영하는 데에 인재의 중요성을 깊이 자각해서 교육에 대한 실질적인 내용도 책 안에 많이 다루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1년의 계획은 곡식을 심는 것만 한 것이 없고, 10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는 것만 한 것이 없고, 일생의 계획은 사람을 심는 것이 없다는 교육에 대해 잘 알려져 있는 글귀도 이 책에 실려 있는 글이다. 그 스스로가 뛰어난 인재로서 제나라가 부흥하도록 이끌었던 경험이 있었기에 인재의 중요성과 올바른 교육에 대해 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제자로서의 태도

하지만 그 나라는 관자가 죽은 후 곧 쇠락의 길을 걷는데 이는 인재의 중요성을 깨우쳤지만 정작 자신의 뒤를 이을 휴계자를 키우지 못했던 탓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 관자에서는 스승의 가르침에 제자는 공손한 태도와 겸허한 마음으로 배운 바를 극진히 해야 하고, 선한 것을 보면 따르고 의로운 일을 들으면 실행해야 한다. 항상 온유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힘만 믿고 교만해서는 안 된다. 뜻을 허망하거나 사악한 데 두어서는 안 되며, 행실은 곧아야 하고 노니는 곳이나 거처하는 곳은 일정해야 하며 덕이 있는 사람과 사귀어야 하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이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의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 말하는 내용으로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그 가르침도 상세하고 구체적인데 만약 이러한 그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였던 인재가 있었다면 관자의 뒤를 이을 휴계자가 되었을 것이다. 

 

우선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받는 제자가 되려면 그에 걸맞는 태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교육의 효과는 그 내용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주는 사람에게 온화하고 겸손한 자세를 가진 사람은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고 함부로 하지 않으며 이런 태도로 배우는 데에 임해야 그 배운 바를 극진히 할 수 있는 것인제 이를 소수시극이라 한다.

 

극진히 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데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도리를 깊이 연구해서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주자는 소수시극하는 자세를 논어에 실려 있는 거일반삼, 즉 하나를 일러주면 나머지 셋을 안다는 고사에서 찾았다. 이는 하나를 배워 셋을 알려면 먼저 배우는 사람에게 배움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하고 배운 것과 연관되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는 지혜와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배움에 관한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자세가 있어야 오늘 배운 것 하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발전해서 학문의 완성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닦는 노력

진정한 배움

그 다음 배움은 도덕성의 근본인 부모에 대한 효도와 공경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진정한 배움이란 근본을 지키고 익혀 나가는 것이며, 옳고 그름을 알려면 지식을 쌓아나가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도덕성의 근본이 없는 지식을 해악을 끼칠 수도 있기 때문에 오직 효율과 합리만을 가장 가치 있는 덕목으로 여겨서 모든 것을 숫자로 재단하려 하거나 뜻을 사악하고 허망한 데에 두어서 주변에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됨을 피해야 한다.

 

다산은 뜻을 허망하거나 사악한 데에 두지 말라고 하면서 뜻을 바르게 세워야 하고 뜻을 세웠다면 머뭇거리지 말고 용감하게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올바른 뜻에 따라 행하고 싶어하지만 막상 어떤 상황에서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그 순간에 그 일의 이해타산을 따지게 되지 때문이다. 하고자 하는 일이 옳음을 알더라도 닥칠지 모르는 불이익을 생각하거나 잠깐 뜻을 굽혀서 주어질 수 있는 이익을 먼저 생각하게 되면 망설일 수밖에 없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단호한 결단으로 바른 일이라는 확신과 불의에 굽힐 수 없다는 결단이 있다면 흔들리지 않고 단호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다산의 느리게 하지 말라는 조언에는 사람들의 이러한 심리를 관통하는 통찰이 담겨 있다.

 

친구를 사귀는 기준

옛 말에 밖에서 노니는 곳이나 거처하는 곳은 일정해야 하며 반드시 덕이 있는 사람과 사귀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 사람의 한계를 지적하는 말이다. 검은 물감을 만지는 사람은 검은 물이 들고, 빨간 물감을 가까이 하면 빨간 물이 들 수 밖에 없듯이 아무리 피하려고 하더라도 그 자리를 물러나지 않는 이상 물감이 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고전에서는 이런 상황의 인간에게 사람인 이상 주위로부터 영향을 안 받을 수 없다면 좋을 곳을 찾아가면 된다고 조언하고 있다. 바른 사람, 올바른 인재의 곁에 항상 함께 있으면 나 자신도 바르게 될 수 있다는 것인데 다산은 아래와 같이 얘기하였다.

수신은 효도와 우애로써 근본은 삼아야 하니 여기에서 본분을 다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학식이 높고 글재주가 좋더라도 흙담에다 색칠을 하는 것과 같다. 내 몸을 이미 엄정하게 닦았다면 그 벗도 자연히 단정한 사람일 것이고, 동류는 함께 모이므로 특별히 힘을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천륜에 야박한 사람은 가까이해서도 안 되고 믿어서도 안 되며 정성을 다해 나를 섬긴다할지라도 절대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는 이런 사람들은 결국에는 은혜를 배반하고 의리를 망각해서 아침에는 따뜻하게 대하다가도 저녁에는 냉정해지기 때문인 것이다. 이 것은 다산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얻었던 깨우침으로 그의 삶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던 경험이 있기에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친구를 사귀는 기준은 능력도 학식도 아닌 인간의 도리에 본분을 다하느냐에 있고, 인륜에 어긋나는 사람은 아무리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할지라도 피해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닦는 노력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굳이 애쓰지 않아도 비슷한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어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근본 위에 바르게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먼저 바른 뜻 위에 굳게 올라 서게 되면 자연히 바른 뜻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하게 될 것이다. 공부란 것은 모자람에 물들지 않는 분별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물들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를 닦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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